김원용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 인터뷰

어려운 가정 형편, 뇌종양 수술 후유증 극복한 '오뚝이'

"小利 탐하지 말라" 아버지 가르침 새겨... 정직함이 최선

"사법제도 안에서 신속·정확한 권리구제 돕는 게 변호사"

도로교통사고감정사, 공인중개사 등 다양한 자격도 갖춰

"변협 대변인 큰 보람.... 작은 성과 내는데도 큰 노력 필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말고 넓게 바라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평생 택시운전을 하며 소박하게 사셨지만, 제 마음에는 누구보다 큰 거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생 지침으로 삼아 살고자 합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김원용(사법시험 57회) 변호사는 "살면서 손익을 재거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으려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관점은 행동을 추동한다. 생각은 시야가 통제한다. 그는 소탐대실을 늘 경계한다. 송무를 업(業)으로 하지만, 아무 사건이나 맡지 않는다. 

"저를 찾은 의뢰인들에게 건네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소송에 인생을 걸었는지, 이 소송으로 인생이 끝나는지'입니다. 아직 그렇다고 말씀하신 분은 없습니다. 만약 '인생을 걸었다'고 답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사건을 맡지 않을 겁니다.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의뢰인의 사적 감정에 휘둘릴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 변호사는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익이라고 강조했다. 소송을 제기하면 적어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행복해지는 게 맞다고도 했다. 실익 없는 감정 싸움에 불과한 경우에는 소송을 만류하기도 한다. 

"감정이 북받친 상태에서 이뤄지는 사적 복수에 조력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법제도 안에서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을 통해 권리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게 변호사 역할입니다." 

그는 안 되는 걸 된다고 하지 않는다. 상담할 때 의뢰인에게 정직하게 말한다. 무리하게 수임하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사건을 받아놓고 성의없이 처리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지난해 사건 통계를 내보니 패소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가끔씩 받으면 안 되는 사건에 대한 유혹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작은 이익에 연연 말라"는 아버지 가르침을 되새긴다고 했다. 

"변호사는 분쟁에 있어 관여할 수 있는 단계나 형태가 다양합니다. 그런데 분쟁을 해결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의뢰인과 좋은 인연으로 남는 겁니다. 이기기 어려운 분쟁에서는 출구 전략을 구상하고, 감정적 대응으로 임하려는 의뢰인에게 냉정한 진단을 내려주기도 합니다."

김 변호사의 남다른 절제력은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얻게 된 힘이다. 그는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김 변호사가 생애 초반 겪은 치열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요즘엔 너나할 것 없이 '가난팔이'를 하며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어지간한 사연으로는 김 변호사 앞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노원구 하계동에 있던 양돈마을이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축사를 개조한 판자촌이 늘어서 있던 극빈촌이었다. 집에 화장실이 없어 공동변소를 사용하던 그 시절을 김 변호사는 똑똑히 기억한다. 지난달 17일 소천한 독일 선교사 루츠 드레셔(한국명 도여수) 목사도 89년부터 이곳에서 사역했다.

김 변호사는 "루츠 선교사님은 나를 포함한 양돈마을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껴줬다"며 "최근 부고 소식을 들었는데, 하늘나라로 떠난 선교사님을 깊이 추모한다"고 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형제간 우애는 깊었다. '한주먹'하던 그의 친형은 2018년 복싱M 웰터급 한국챔피언을 지낸 김신용 선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한 차례 죽을 고비가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때 뇌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95년 2월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 검사하다가 우연히 뇌종양이 발견됐어요. 그래서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외과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두개골을 절제하고 종양을 제거하는 큰 수술이었습니다. 수술 후에도 적지 않은 후유증에 시달렸지요. 무엇보다 몸이 병약해져셔 수험 공부를 하는 데 지장이 많았어요."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이후에도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수술 여파로 때때로 몸에 마비증상이 왔다. 하지만 털털한 성품을 가진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는 걸 거부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흔들림없이 공부를 이어나갔다. 4번의 도전 끝에 한양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2007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한다. 하필이면 그 시기에 뇌종양 증세가 재발했다. 어쩔 수 없이 항경련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신체 역량이 떨어지면서, 수험생활도 길어졌다.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몸과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2015년 제57회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수험생활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고시 공부를 할 때 가장 힘든 점은 동년배나 후배들이 먼저 합격해서 떠나는 걸 지켜보는 겁니다. 어느 순간 내가 도태되는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어 울적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마음으로 생활했습니다. 항상 밝은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했는데 이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 2년차에는 폐암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천붕(天崩)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부친 소유의 커피·음료자판기를 개인택시모범운전자회에 기증하는 서류에 대신 서명했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장례식장에 정말 많은 조문객이 오셔서 아버지를 기렸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이익만 좇으며 살았다면, 그렇게 많은 조문객이 찾아와 슬퍼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으로 남겨진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과 맞닿아 있습니다." 

실력 좋기로 소문난 그에게 기억에 남는 승소 사례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손사레를 치며 "고객과 관련한 내용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약간의 성과만 거둬도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SNS)에 "내가 이겼다"며 자랑하는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 대신 "나와 인연을 맺은 의뢰인들이 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저는 매 사건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변호사의 소송사무 수행은 의뢰인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드리는 것만큼이나 과정에 대한 이해를 시켜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늘 의뢰인분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찾으려 합니다."

업무 성향은 치밀하고 꼼꼼하다. 사건을 맡으면 사무치게 일한다. 미시적인 영역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잘 관찰해낸다. 최근에는 교통사고와 부동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원활한 업무처리를 위해 도로교통사고감정사와 자동차진단평가사, 공인중개사 자격증까지 따로 취득했다. 바닥까지 깔끔하게 훑는 업무 습관이 엿보인다. 사고현장 등 실사도 자주 나가는 편이다. 그는 "의뢰인의 앞날을 위해 당면한 법적 문제를 잘 매듭짓는 게 내 역할"이라고 했다.     

△ 김원용 변호사 사무실 벽면을 채우고 있는 각종 자격증. 그는 공인중개사, 도로교통사고감정사, 자동차진단평가사 등 자격을 별도로 취득했다. 
△ 김원용 변호사 사무실 벽면을 채우고 있는 각종 자격증. 그는 공인중개사, 도로교통사고감정사, 자동차진단평가사 등 자격을 별도로 취득했다. 

한편 김 변호사는 지난해 출범한 대한변협 제52대 집행부에 합류했다. 현재는 대변인으로 활약 중이다. 그는 지난해 일궈낸 국선전담변호사 보수 인상 성과를 언급하며 "회무에서는 작은 성과를 내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협회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입법이나 정부의 재정지원을 통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만 잘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쉽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김영훈 협회장님을 보좌하는 집행부 일원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김 협회장님은 너른 시야로 사안의 입체성을 고루 살피시는 분입니다. 배려심도 남다르시고요. 부족한 점도 있지만, 집행부 일원들은 저마다 소명 의식을 가지고 업무에 임합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토론하고 결정하면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변호사는 "변호사는 21세기 검투사"라며 "작은 일에 성심을 다해 꾸준히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변호사는 법치주의 하에서 의뢰인의 권익보호를 위해 싸우는 검투사입니다. 변호사로 일하는 이상, 소속은 자주 바뀌더라로 개인 브랜드는 지속됩니다. 선한 일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좋은 평판을 쌓는 게 중요합니다. 이러한 일은 의도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쌓여 자연스레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글= 왕성민 편집위원, 사진=임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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