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주 변호사
전선주 변호사

필자는 2017년 서울회생법원 법인파산부 소속 판사로 업무를 하며, 1년 동안 한 주에 많으면 3차례가 넘도록, 파산신청을 한 회사의 대표이사들에게 많은 질문을 함과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실로 귀중한 경험을 한 바 있다.

파산신청을 한 회사들의 대표이사는 대부분 그 회사들의 실소유주이기도 하였는데, 거칠게 표현하면 회사 자체가 그들의 인생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침몰해 가는 회사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이고 친인척 및 지인들에게까지 돈을 빌려 쏟아 부었고, 그 과정에서 암이나 중풍에 걸리는 등 자신의 건강을 잃기도 하였으며, 가정파탄은 물론 인간관계의 단절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심문실에서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친 후 ‘그 동안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는 말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는 대표이사들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당사자가 특정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내용 일부는 각색하였음을 밝힌다). 2017년 00월 00일 오후 4시, 그날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파산한 회사의 심문기일 참석을 위하여 서울회생법원 심문실로 향했다. 심문실에는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파산신청을 한 회사는 인테리어를 위주로 하는 조그만 건설회사였는데, 내 앞에 앉은 대표이사는 그러한 사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표정은 몹시 복잡해 보였다. 터지기 직전의 여러 감정들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기록을 열고 심문을 시작했다.

스토리는 이러했다. 파산신청을 한 회사는 설립된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신생회사로, 대표이사는 비록 부인의 명의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남편이 운영하던 회사였다. 실제 운영자인 남편이 채무로 인한 압박감을 이지기 못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서, 명목상 대표이사로 되어 있던 부인이 파산신청을 하게 된 것이었다.

미리 검토한 파산신청서에 따르면 부채는 4500만 원 정도에 불과한데다가 회사는 파산신청을 하기 한 두 달 전에 매출채권 3500만 원을 지급받은 적도 있어 재무사정이 최악이라고까지는 볼 수 없었다. 남편이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곧 부인으로부터 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수년 전에도 사업실패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남편은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대부분이 회사의 채무를 연대보증함에 따른 보증채무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인 2012년경 개인회생절차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개인회생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당시 법률에 따라 5년 동안 성실하게 변제액을 납부하여 왔다고 한다.



파산신청일 기준 비교적 최근인 2016년경까지 남편은 개인회생절차에 따른 5년간의 변제를 모두 완료하였고, 빚에서 해방이 되었다. 즉, 남은 채무에 대하여 면책결정을 받게 된 것이다. 면책결정을 받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지난 5년 동안 남편이 겪었을 고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업실패로 인하여 남편 자신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도 허리띠를 극도로 졸라 매어야 하는 궁박한 생활을 해왔다. 그에 대한 가족들의 불만은 남편 스스로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부에게는 당시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아이가 두 명이 있었고, 그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역시 남편을 짓누르고 있었다. 드디어, 그렇게 5년 간의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내고, 빚에서 해방된 남편은 다시 야심차게 사업을 시작하였다. 아마도 다시는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반드시 성공해서 가족들에게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할 것이라고 수없이 다짐했었으리라.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사업에서 적자가 나기 시작하였다. 남편이 느꼈을 압박감과 절망감, 그리고 어쩌면 다시 장기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공포감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으로 인하여 고생을 한 부인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혼자서 버티기에는 그 부담감이 너무 무거워서였을까. 결국 남편은 이 모든 것을 홀로 떠안고 지난 5년간의 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였다.

대표이사로 출석한 아내 역시 슬프고 착잡한 표정으로 남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다. 남편이 사업실패을 한 2012년 무렵부터 부부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모진 말들을 계속적으로 퍼붓게 되었고 남편은 나날이 위축되어 갔다고 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5년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이 2017년에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이미 단절된 상태였다. 남편은 다시 사업을 시작한 이후 회사의 사정에 대하여 부인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그 동안 자신이 남편에게 지나칠 정도로 거칠게 다그쳤던 말이나 행동들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관계가 순탄하지 못했을지라도 배우자를 허망하게 잃은 슬픔은 깊고 또 무거운 것이었다. 심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참으로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 이러한 사례 등에 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위 사건이 접수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개인회생사건에서의 변제기간이 5년에서 3년으로 단축되었다.

채무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보다 단축된 것이다. 개정된 법이 시행된 2018년 6월 13일 이후에 채무자들은 원칙적으로 3년 동안 자신이 벌어들이는 소득에서 생계비를 뺀 금액을 변제하면 나머지 채무에 대해서 면책결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법 개정이 남편의 극단적 선택 이전에 이루어졌다면 남편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개인을 지나치게 장시간 방치하게 되면 극단적인 선택이 증가하리라는 것은 명확하다. 물론 아무런 고통 없이 무제한 개인의 채무를 면제해주게 되면 채권자 입장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고 오히려 우리 경제에 악영향이 되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 또한 소홀히 다루어져는 안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위와 같은 법률의 개정은 국회에서 잠재적 도덕적 해이로 인한 문제보다는 채무자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파산사건 심문이 있은 후 약 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 회원가입국 중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경제적 어려움'은 어느 원인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실물경제지표의 하락과 고금리 기조 유지 등으로 다시 한번 우리 국민들에게 커다란 경제적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로써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법인 및 개인의 도산제도가 보다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제도들이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여 자살율 1위 국가라는 오명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전선주 변호사
법무법인 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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