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외우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보다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더 친숙하고 의미전달도 더 명확한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뜻은 개개인이 선한 목적을 가지고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좋은 정치적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무리를 이룬 집단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동물적 본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집단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려면 무엇보다 니편보다 내편이 많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나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내편인지 아닌지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진보니 보수니, 강북과 강남뿐만 아니라 지역 간, 세대 간, 심지어 남자와 여자도 편을 가르려고 든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이 된 것은 무리를 이루려는 습성 때문이 아니라 모르는 개체와도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사피엔스’에서 역설한다.

니편 내편을 가르는 것이 일반화된 사회는 경직될 수밖에 없고 경직된 사회는 작은 충격에도 취약하여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살펴보면 어느 사회나 자신감에 차 있을 때 가장 유연성을 보여준다.

세상에 온통 내편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 어디를 가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나와 닮은 사람만 있다면 그곳이 과연 천국일까. 아마도 남자만 우글거리는 정글이거나 여자만 사는 아마조네스처럼 끔찍하지 않을까.

그래도 세상이 아름다운건 인종, 피부색, 풍습과 종교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인간들이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처럼 서로 전혀 모르면서도 공동의 선을 위해서라면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서로의 차이 때문에 우리 삶이 더욱 풍부해 진다는 것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까? 우리는 오직 다양성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어려운걸까? 우리 사회가 자꾸만 니편 내편을 가르고 줄서기를 강요하는 것은 우리가 좋은 정치공동체를 만드는데 실패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다. 또 그런 만큼 법조인은 니편 내편을 가를 때 법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용당하거나 아니면 자청해서 선봉에 서려는 유혹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법치주의의 확립은 좋은 정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우리가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법조인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하는 이유다.

 

 

/윤상일 변호사

서울회·서울종합 법무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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